본문 바로가기
  • 삶을 오르는 날들
살아있는 것만으로/Day by day

아빠에 대한 기록

by Thanks Joanne 2021. 7. 5.
반응형


2020년 11월, 아빠는 소화가 잘 안되고 변비가 생겼다고 했다.
2019년 5월에 담낭에 있는 작고 딱딱하고 까만 암 조각을 떼내는 수술을 하고 6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온 11월 검진을 앞두고 복부에 느껴지는 이상함을 참아내고 있었다.
11월 검진을 가서는 급하게 입원을 하고 PET CT를 찍고 이런 저런 검사를 했는데 아빠가 많이 힘들어 했다.


아빠는 병원에 있던 2주 동안 10kg이 빠졌다.
병명은 담낭암 말기에 복막전이, 뼈전이로 허리와 골반쪽 뼈에 암이 전이가 되었고
암세포가 복막에 흩뿌려지듯이 뿌려져있어 복막의 소화를 막아 배에 복수가 차고 있었다.
아빠는 매일 복수를 뺐는데 가장 많이 뺀 날은 3L였다.


의사 선생님은 길어야 3-6개월이라고 했지만 다행히 항암주사가 잘 맞아 부작용도 없고 다른 환자들처럼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아빠는 식사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식욕도 왕성했고 조금씩 자주 드셨다.
항암을 시작하고 입맛이 바뀐다더니 일반 수저에서는 쇠냄새가 난다고 나무 식기를 썼고
초콜렛, 양갱, 떡, 요거트, 국수, 우동 등을 많이 드셨다.
51kg까지 빠져서 우리는 걸그룹 몸무게라고 놀리기도 하고 암 진단을 받기 이전처럼 생활이 돌아갔다.


동생은 코로나 덕분에(?) 재택근무를 격주로 하며 서울과 당진을 왔다 갔다 했다.
언니가 주로 아빠가 병원갈 때 기사역할을 했는데 어느 순간 부터는 항암하는 게 큰 무리가 없었는지
혼자 시외버스타고 천안을 왔다 갔다 하며 여기 저기 구경도 하고 그랬다.
아빠는 혼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

 

 

 

 

 

 

 

 

 

 


3월에는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가자고 했다.
코로나도 그렇고 아빠가 힘들 것 같다고 날씨가 조금 풀리고 코로나 잠잠해지면 가자고 했다.
4월이 지나고 날씨가 좋아지니 아빠는 밭일도 가끔하고 나무에 약도 주고 닭장 청소도 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막내 삼촌이랑 외숙모가 아빠 본다고 오셨는데 그 날은 정말 컨디션이 좋아서
계속 환하게 웃고 강아지랑 고양이도 예뻐하고 나무에 약도 치고 마당을 많이 돌아다녔다.
그날 참 행복했는데... 그때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랬고 아빠가 계속 나을거라 생각했다.

 

 

 

 

 

 

 

 

 

 

아빠가 생전처음 엄마에게 사준 꽃

결혼기념일 기념으로 처음으로 사줬다.

물론 엄마 카드,,,ㅎ,,,

 

 

 

 

 

 

아빠가 입원하기 전 마지막으로 드신 간식들...
가끔 내가 아빠 운동을 같이 다녔는데 어버이날 선물로 자전거를 사주겠다 하니 왠일로 같이 타게 두 대를 사라고 했다.
아빠가 왠일로 순순히 사달라고 하지 싶었다.
어버이날 주에 딱맞춰 자전거가 와서 형부가 조립을 해줬는데 날씨가 너무 안좋아 타보지는 못하고 앉아만 봤다.
그때 다시 아빠가 속이 불편하다며 다가오는 항암때에 가서 검사를 다시 해야할 것 같다고 했다.
그 다음날 부턴가? 자꾸 토하고 설사하고 다시 복수가 차오르는 듯 했다.
아빠는 결국 5월 12일 저녁에 언니에게 병원에 가야할 것 같다고 응급실에 갔다.


아빠는 통합간병실로 입원했다.
예후가 갑자기 좋지 않았다.
항암약이 이제 약빨이 떨어져서 항암약을 바꿔야 하는데 여명이 얼마 안남은 것 같다고 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못먹고 영양제를 맞으며 버텼다.
매주 아빠를 보러 가면 그 와중에도 옆 침대 환자분들께 계속 말걸고 간호사들한테 장난치고 있길래
아직은 아빠가 괜찮은 줄 알았다.
아빠는 살고 싶어했다. 아빠는 의지가 강했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했다.

 

 

 

 

 

 

 

 

 

 

 

 

 

 


항암제를 바꿨는데 면역력을 올려준다고 했다.
3주에 한 번 260만원이었지만 아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아빠는 칼국수, 만두, 호떡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나중엔 결국 콧줄을 꼈는데 따뜻한 유자 음료수랑 요플레를 사다달라고 해서 사다드리니 한 모금 먹자마자 배가 부풀어 그만뒀다.
아빠는 자꾸 토를 했다.
먹는 것도 없는데 나오는 토는 담즙이나 위액 등이 섞인 분비물 같은 거였다.
어느날은 엄마랑 셋이 아빠 보러 올거면 면도기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근데 그 날 못갔다.
아빠가 엄청 서운해 했다.
그날 안간게 너무 너무 많이 후회가 된다.

 

 

 

 

 

 

 

 

 

 

 

 

 


입원한지 2주가 지나면 다른 병원으로 가는게 원칙이라나? 요양병원으로 옮기게 됐다.
요양병원에 가는 날 만난 아빠는 며칠만에 너무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전화를 하면 받긴했지만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들 곧 임종이 왔음을 깨달았고....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소리를 계속 들었지만 믿기 싫었다.
아빠한테 전화로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했는데 아빠가 나도 사랑해라고 했다.


6월 1일, 병원에서 임종면회를 하러 오라고 했다.
면회 앞에 임종 이라는 두 글자가 붙어있는게 너무 괘씸하고 슬펐다. 정말 싫었다.
아빠는 20일째 아무것도 못먹고 너무 아프다 보니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할 말있냐고 하니까 아빠때문에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고 영원히 사랑한다고 했다.
그동안 정말 고생많이 한 엄마랑 언니에게 얘기할 때 정말 많이 슬퍼보였다.
자꾸 초점이 흐려지고 말하다가 잠들고 그랬다.
아빠도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나 보다.
동생이 조금만 더 같이 있어주면 안될까?하고 물어보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아빠한테 사랑한다고 많이 얘기하고 이제 아프지 말고 먼저 가서 쉬고 있으라고 했다.
아빠는 형부한테 아버지라고 한 번만 불러달라고 했다.
그리고 하늘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는데 추울까봐 창문을 못열어줬다.


이날 동생이 영상을 찍어 놓았는데 찍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코로나때문에 20분밖에 면회를 못했는데 정말 원망스러웠다.
나는 이날에서야 아빠를 이해하게 된 것이 많았다.
아빠가 우리를 정말 많이 사랑했구나 하는 것을 이 날 많이 깨달았다.
그 다음날엔 아빠의 형제들이 임종면회를 왔다.
코로나때문에 한 번에 6명밖에 안되어 우리는 가지 못했다.
저녁쯤 아빠에게 전화를 하니 요양보호사분이 전화를 받아 아빠 귀에 대주었고
동생들 왔다가서 좋냐고 물어보니 어 라고만 했다.


6월 3일 아침
회사 워크샵날이라 9시에 일어났는데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혈압이 너무 떨어져 승압제를 쓰겠다며 오늘을 못넘길거라는 소식이었다.
동생과 함께 바로 버스를 타고 언니네로 가서 연락이 올때까지 대기했다.
2시 좀 넘어서 점심먹기로 하고 라면을 끓여 한 젓가락씩 먹었다.
병원에서 빨리 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도착하니 방금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빠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코로나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아빠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요양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나랑 동생은 아빠의 손을 계속 주물렀다.
아빠의 손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고 색이 변하고 있었다.
믿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냥 자는 것 같았는데 심장이 뛰지 않더라..
2시 20분 아빠가 숨을 거둔 시간이라고 한다.



형부가 정신없는 와중에 다 정리해주고 연락하여 장례식장에서 차가 왔다.
아빠가 베고 있던 베개를 치우니 통나무처럼 굳은 걸 보고 실감이 조금 났다.
하얀 천으로 아빠 머리를 덮는데 실감이 조금 더 났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염하는 곳에 보관실에 아빠를 넣었다.
그 장면이 자꾸 잊혀지질 않는다.
차가운 냉동창고 같은 데에 아빠를 혼자 놔둔다
생각하니 외로움 많고 혼자있는거 싫어하는 우리 아빠가 너무 걱정됐다.
비가 많이 왔고, 지방이다보니 주변에 연락을 다 돌리는게 너무 미안했다.
다행히 지인들이 서로에게 연락해주어 많은 분들에게 연락이 왔고 코로나임에도 많은 분들이 와주셨다.
상주인 형부가 너무 고생하셨고 처음으로 아들의 중요성도 느끼고 결혼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둘째 날이 금요일이다 보니 퇴근하고 온 지인이 많았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아빠는 인싸이고 싶어하니 100% 이 날짜를 계획한걸거라고 얘기했다.


염하고 입관식을 하는데 수의가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아빠를 너무 꽉꽊 묶는데 보기가 너무 싫었다.
마지막으로 아빠를 만졌는데 우리 아빠 같지 않고 낯설어서 너무 싫었다.
관에 짧게 편지를 써주라고 하길래 뭐라 썼는데 기억이 잘 안난다.
정말 많이 울었다. 너무 너무 많이 울었다.


발인날이 되어 화장터에 가는데 지하에서 추모 예배를 하고
아빠의 사촌들과 형제들이 관을 들었고 링컨이라는 리무진에 실었다.
언니는 조카들을 챙겨야해서 나랑 형부랑 엄마가 그 차에 찼다.
이렇게 좋은 차를 아빠는 죽어서야 타다니 아빠의 삶이 참 안쓰러웠다.
홍성 화장터에 5번 화장터에서 아빠의 화장이 진행되었다. 1시간 반 넘게 걸렸다.
마지막에 화장이 끝남을 보여줬는데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아빠를 이제 진짜 볼 수 없음을 실감했다.


장지에 가서 아빠의 유골함을 넣고 봉안 비석을 얹었다.
흙을 세 번씩 뿌리라고 했는데 눈물이 계속 나서 앞이 잘 안보였다.
아빠가 보고 싶어했던 하늘, 참 맑았고 따뜻했다.
다같이 인사를 하고 기도를 하고 친척들과 상복을 벗으며 인사도 하고 밥먹으러 갔다.
집에 돌아가 씻고 잠들었는데 엄청 깊게 잠들었다. 3일 장을 마치고 나니 정말 너무 힘들었다.

 

 

 

 

 

 

 

 

 

 

 

 

 



이제 한 달이 조금 지났다.
나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요새 들어 너무 힘들다.
자꾸만 아빠 몸에 있던 수많은 바늘 자국과 뜻을 모르겠는 알파벳, 그리고 자전거가 생각이 난다.
회사에서는 일을 해야 하니 괜찮은데 집에 돌아오면 마음이 너무 힘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무기력하고 자꾸만 눈물이 차오른다.
기도를 많이 하게 돼서 종교의 힘을 빌리고 의지를 많이 하는데 CCM듣는게 위로가 많이 된다.
요즘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폭풍 속의 주를 정말 많이 듣는다.
누군가와 이야기 하는 것도 힘들고 그냥 힘들다.
아빠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에 눈물이 난다.


우리 아빠 우리한테 잘해주지도 않았는데....우리는 왜 이렇게 아빠를 그리워할까.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근데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아빠의 죽음을 인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아직도 요양병원에 있는거 같다가 아빠를 넣었던 그 냉동창고가 생각나며 실감이 나고
아빠가 꿈에 나와도 꿈에서도 아빠가 죽음을 인식하고 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매일 이상하다. 아직 회복이 안된다.
아빠의 장례를 함께 슬퍼해준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고맙다고 꼭 만나자고 했는데
연락할 기운이 안나 자꾸 마음의 빚이 쌓이는 기분이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슬프다.
아직 한 달밖에 안지났으니 어쩔 수 없지....
조금만 더 슬퍼하자.
아빠가 언제나 맘속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고...
아빠 많이 많이 사랑해 영원히 기억할게

 

 

 

 

 

 

 

 

 

 

 

 

반응형

댓글